야구선수 장훈 별세|사망 원인|나이 국적 고향|기록|가족 부인 자녀|

장훈이라는 이름은 일본 프로야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한국명 장훈, 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로 알려진 그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편견과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실력 하나로 일본 야구의 정상에 올라선 불세출의 타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어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오히려 이를 극복하고 누구보다 정교한 타격을 선보이며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롯데 오리온스에서 활약하며 23년 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히 1980년에는 통산 3,000안타를 넘어 최종 3,085안타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며 일본 야구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겼습니다. 현역 은퇴 이후에도 야구 해설과 평론, 한국 프로야구 발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선수 이상의 발자취를 남겼던 장훈은 2026년 9월 9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삶 속에서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던 일본 야구의 전설 장훈, 그의 기록과 인생 이야기를 차근차근 돌아보겠습니다.
◇ 한국 성명 / 이름
장훈 (張勲)
◇ 일본명 / 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張本 勲)
◇ 생년 월일
1993년 8월 30일


◇ 사망일자
2026년 9월 9일
◇ 나이 / 향년
86세
◇ 국적
일본
◇ 본관
인동 장씨


◇ 태어난 곳 / 고향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 사망지
도쿄
◇ 학력
히로시마 시립 히지야마 초등학교 (졸업)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 (졸업)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 (졸업)
◇ 신체
키 / 신장
181cm
몸무게 / 체중
85kg
혈액형
공개되지 않음


◇ 선수 시절 포지션
좌익수
◇ 선수 투타
좌투좌타
◇ 장훈 선수 시절 등번호
10번
◇ 프로야구 데뷔 / 입단
195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토에이 플라이어즈)


◇ 프로야구 소속팀
토에이 /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 닛폰햄 파이터즈 (1959년 ~ 197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년 ~ 1979년)
롯데 오리온즈 (1980년 ~ 1981년)
◇ 지도자 경력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군 수석 / 타격코치 (1973년)
◇ 가족 관계 / 집안
부모님
아버지 장상정
어머니 박순분
형제자매
누나 2명 / 형 1명
부인 / 아내
재일교포
자녀
딸 2명
◇ 종교
공개되지 않음
◇ 주요 프로야구 기록
통산 안타 : 3085개 / 일본야구 역대 최고 기록


◇ 주요 수상
1980년 대한민국 체육훈장맹호장
2007년 국민훈장 국민훈장무궁화장
◇ 전 야구선수 장훈 사망 원인 / 사인
언론 보도 및 유족 측을 통해 구체적인 병명이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전 야구선수 장훈 장례 일정 / 빈소
일본에서 장례 예정
◇ 전 야구선수 장훈 묘지 / 장지
현재 공개되지 않음


◇ 일본야구 최다안타 장훈 전 야구선수 별세 / 추모
일본 프로야구를 이야기할 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명 장훈, 일본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전설적인 야구선수입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누구보다 많은 안타를 때려낸 타자로 오랫동안 기록의 상징처럼 기억되어온 그는 단순히 뛰어난 야구선수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어 왼손잡이 타자로 야구를 시작했고,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견뎌야 했으며, 프로 입단 과정에서도 국적이라는 벽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을 하나씩 넘어 결국 일본 프로야구 통산 3,085안타라는 누구도 쉽게 넘보기 어려운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대한민국 야구 발전에도 힘을 보태며 또 다른 방식으로 야구와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2026년 9월 9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야구팬들이 다시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장훈은 19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명은 장훈이며 일본명은 하리모토 이사오입니다. 본관은 인동 장씨로 알려져 있으며, 부모 역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한국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장상정 씨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뒤 어머니 박순분 씨가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민과 정착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장훈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야구선수로 성공한 뒤에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훗날의 야구 인생을 바꿔놓은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른손의 심각한 부상이었고, 또 하나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라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어린 장훈은 집 근처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중 후진하던 트럭을 피하려다 불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는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손가락 일부가 붙고 손의 움직임에도 큰 제약이 생겼습니다. 원래 오른손잡이였던 어린 소년에게는 앞으로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큰 장애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이 부상은 역설적으로 그가 야구선수로서 왼손을 사용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여기에 히로시마에서 겪은 전쟁의 기억도 그의 어린 시절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당시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나이에 손의 장애와 가족을 잃은 상처를 동시에 경험한 셈입니다. 평범한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환경이었지만, 장훈은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야구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야구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영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진학한 중학교에 수영부가 없었고, 대신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왼손으로 공을 던지고 타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운동 능력은 남달랐습니다. 투수와 타자 모두에서 재능을 보여주었고, 특히 타격 능력은 일찌감치 주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과정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러 명문 고등학교를 생각했지만 학교 측의 판단으로 입학이 거절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오사카의 나니와 상업고등학교에서 야구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투수로 활약하다 어깨에 문제가 생기면서 야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타자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훗날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교타자로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 장훈의 타격 실력은 이미 전국적인 관심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1957년 가을에는 긴키 지역 대회 예선에서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고, 이후 재일 한국인 고교야구 선수단으로 참가한 경기에서도 맹활약하며 홈런상과 대회 MVP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또래 가운데에는 훗날 일본 야구의 또 다른 전설이 되는 오 사다하루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찍부터 일본 야구계에서 주목받으며 '동쪽의 오, 서쪽의 하리모토'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여러 프로구단이 장훈을 원했습니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비롯해 여러 구단에서 영입 의사를 보였지만, 장훈의 앞에는 또 하나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적 문제였습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는 외국인 선수에 대한 제한 규정이 존재했고,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던 장훈 역시 그 규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훈은 귀화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구단 측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유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가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도에이 플라이어스가 장훈을 영입했고,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후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선수라면 국적과 관계없이 외국인 선수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 방향으로 규정이 정비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장훈의 프로 진출은 훗날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 한국인 선수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남기게 됩니다.


1959년 프로야구에 데뷔한 장훈에게 첫 시즌부터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데뷔전에서는 삼진을 당했고 수비에서도 실수를 범하면서 교체되는 등 혹독한 프로의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이튿날 첫 안타와 첫 홈런을 기록했고, 불과 몇 달 만에 중심타선으로 올라섰습니다. 고졸 신인으로 4번 타자에 기용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첫 시즌부터 팀 내 최다 홈런과 최다 타점을 기록하고 신인왕까지 차지했습니다.
그때부터 장훈의 전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960년에는 개막 이후 연속 경기 안타 행진을 이어갔고 올스타전에 출전해 MVP를 받았습니다. 1961년에는 사이클링 안타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타격왕에 올랐습니다. 1962년에는 타율 3할3푼3리, 31홈런, 99타점을 기록하며 시즌 MVP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도에이 플라이어스가 일본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장훈은 뛰어난 타격을 선보였습니다.
장훈의 진정한 무서움은 한두 시즌 반짝하는 선수가 아니라 매년 꾸준히 안타를 만들어내는 선수였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타격왕에 여러 차례 올랐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무려 4년 연속 수위타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1970년에는 3할8푼3리라는 놀라운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한 시즌의 최고 기록만을 남긴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꾸준하게 안타를 생산해냈다는 점에서 장훈은 일본 야구사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선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그의 방망이는 쉽게 식지 않았습니다. 1972년 다시 타격왕에 올랐고, 1973년에는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면서도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974년에는 또다시 수위타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오랜 기간 정상급 타자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타격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이 언제까지나 순탄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상과 컨디션 저하도 찾아왔고, 1975년에는 타율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합니다. 1975년 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면서 센트럴리그 무대로 옮겨간 것입니다. 당시 요미우리에는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거포 오 사다하루가 있었고, 장훈의 합류로 두 선수의 이름을 따 'OH포'라는 강력한 타선이 만들어졌습니다.
요미우리에서의 장훈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1976년에는 타격 2위를 기록했고 30경기 연속 안타라는 당시 센트럴리그 신기록도 세웠습니다. 이듬해에도 타격 2위에 오르며 여전히 정상급 타자로서의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요미우리는 장훈의 활약을 바탕으로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1978년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가 만들어졌을 때 장훈은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됐습니다. 이는 그가 이미 일본 야구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부상과 질환의 영향이 나타났고 1979년에는 출전 경기 수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팀을 찾아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28일,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롯데 오리온스 소속으로 뛰던 장훈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0안타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한 명의 선수가 프로야구에서 3,000개의 안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경기와 수많은 타석을 견뎌야 하고, 부상과 슬럼프를 극복해야 하며,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출전해야 가능한 기록이었습니다.
장훈의 최종 통산 기록은 2,752경기 출장, 타율 3할1푼9리, 504홈런, 3,085안타, 1,676타점, 319도루로 정리됩니다. 특히 3,085안타는 오랫동안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홈런을 500개 이상 기록하면서 동시에 30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했다는 점도 그의 전천후 타격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단순히 안타만 잘 치는 선수가 아니라 장타와 주루 능력까지 갖춘 매우 완성도 높은 타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1년을 끝으로 장훈은 23년에 걸친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가 은퇴할 당시 이미 일본 야구계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훈의 야구 인생은 선수 생활의 종료와 함께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이후에는 한국과 일본 야구를 연결하는 역할까지 맡게 됩니다.
1982년 대한민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당시 장훈은 KBO와 인연을 맺고 한국 야구의 발전을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KBO의 총재 특별보좌관 등을 맡아 오랜 기간 한국 프로야구와 관련된 일을 했으며, 일본에서 쌓은 풍부한 야구 경험과 인맥을 한국 야구계에 전달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소개를 통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인물도 있었으며, 일본과 한국의 야구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공로를 인정했습니다. 1980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3,000안타 달성을 기념해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고, 이후 2007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한 스포츠 선수로서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선수로서 쌓은 업적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일본 야구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계속됐습니다. 이후에는 방송 해설가와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선수 시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야구팬들과 만났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스타일로 유명해졌으며,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 해설로 '쓴소리' 이미지도 갖게 됐습니다.
장훈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기록만 바라봐서는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085안타라는 숫자 뒤에는 어린 시절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과정이 있었고, 재일 한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편견도 있었습니다.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국적이라는 문제와 마주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일본 야구계 정상까지 올라서야 했습니다. 그가 뛰었던 시대는 지금보다 사회적 편견이 훨씬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훈의 성공은 개인적인 스포츠 기록을 넘어선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오른손의 장애 때문에 오히려 왼손 타자가 되었고, 그 왼손으로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를 새롭게 썼습니다. 어린 시절의 사고가 그의 인생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그것을 자신의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시작할 당시부터 남들과 다른 조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타석에 서서 안타를 만들어내는 선수가 됐습니다.
또한 오 사다하루와의 관계 역시 장훈의 야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라이벌로 비교됐던 두 사람은 훗날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로 함께 기억됐습니다. 장훈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두 사람은 같은 팀에서 강력한 타선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라이벌이면서 동료였고, 일본 야구의 한 시대를 함께 상징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특별한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장훈은 2024년 12월 일본 귀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관심을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재일 한국인 선수로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국적 문제는 젊은 시절부터 계속 따라다닌 주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생애 후반기에 전해진 이 변화 역시 많은 이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국적과 별개로 그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야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이미 매우 깊습니다.
그리고 2026년 9월 9일, 전설적인 야구선수 장훈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일본 언론을 통해 그가 도쿄의 한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오랜 시간 일본 야구를 지켜본 팬들과 한국의 야구팬들에게도 안타까운 소식이 됐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타자가 이제는 더 이상 타석에 설 수 없게 됐지만 그가 남긴 기록과 이야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장훈이 남긴 3,085안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일같이 타석에 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결과입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기록도 아니며 한두 시즌의 폭발적인 활약만으로 얻을 수 있는 기록도 아닙니다. 수많은 경기에서 투수의 공을 상대하고, 수많은 부상과 슬럼프를 견디며, 다시 다음 경기를 준비했던 세월이 모두 쌓여 만들어진 기록입니다.
그의 통산 기록을 바라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3,085개의 안타뿐 아니라 504개의 홈런과 319개의 도루까지 기록했습니다. 타격왕도 여러 차례 차지했고, 4년 연속 수위타자라는 대기록도 남겼습니다. 그만큼 장훈은 한 가지 능력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타격과 장타, 주루에서 모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야구팬들이 그를 '안타 제조기'라고 부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장훈의 삶에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큰 부상을 당했지만 야구를 시작했고, 야구를 하면서도 여러 번 진로의 위기를 맞았지만 타자로 전향하며 다시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국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올라섰고,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마주하면서도 결국 실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한국 야구에 남긴 발자취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선수가 은퇴 이후 한국 프로야구의 시작과 성장 과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의미가 큽니다. 한쪽 나라에서만 성공한 야구인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두 나라의 야구 발전에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장훈은 선수 생활이 끝난 뒤에도 야구장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이크 앞에서 경기와 선수들을 이야기했고, 때로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선수 시절에는 방망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은퇴 후에는 말과 경험으로 야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야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평생 이어진 삶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6년 9월 9일 장훈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제 그의 모습은 기록과 영상, 그리고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서 만나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선수의 삶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남긴 3,085안타는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 속에 남아 있고, 수많은 타격 기록과 수상 경력 역시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했던 소년이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가 되기까지 걸어온 길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아픔을 경험했고,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견뎌야 했으며, 선수 생활 중에도 수많은 경쟁자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야구라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했고, 마침내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누구도 쉽게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한국명 장훈, 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두 이름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사회의 역사와 야구가 맞닿아 있는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단순히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선수'라는 한 줄로 끝나서는 아쉬울 것입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길을 개척한 선수였고, 자신의 실력으로 편견을 넘어선 사람이었으며, 은퇴 후에는 한일 야구의 연결고리 역할까지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장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기록은 여전히 타석에 남아 있습니다. 3,085개의 안타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꾸준히 야구를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 뒤에는 오른손의 장애를 극복한 어린 소년, 가족과 함께 힘겨운 시대를 견뎌낸 한 사람, 차별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수, 그리고 끝내 일본 야구의 전설이 된 한 남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일본 야구의 전설로 기억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재일교포 야구인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안타를 만들어낸 최고의 교타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든 분명한 것은 장훈이라는 이름이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랜 세월 야구팬들에게 희로애락을 안겨주었던 그의 방망이는 이제 멈췄지만, 그가 남긴 3,085개의 안타와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도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것입니다.


86년의 삶을 마감한 장훈. 어린 시절의 아픔과 수많은 장벽을 뛰어넘어 일본 야구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안타를 추가할 수 없지만, 그가 만들어낸 기록과 야구에 대한 열정은 오랫동안 살아 있을 것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타자의 마지막 길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이자 한국 야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장훈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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