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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알림센터

명진스님 입적|사망 원인 프리다이빙 사고|종파|나이|고향|저서 책

by 정보알림센터 2026.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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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입적|사망 원인 프리다이빙 사고|종파|나이|고향|저서 책


2026년 8월 22일, 오랜 세월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우리 사회에도 깊은 목소리를 남겼던 명진 스님이 갑작스럽게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속명 한기중, 법명 명진(明盡)으로 알려진 스님은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뒤 불교와 인연을 맺으며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한때 출가를 포기하기도 했지만 다시 수행자의 길로 돌아와 50안거 이상 정진하며 선 수행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명진 스님은 산중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조계종 개혁과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우리 사회의 여러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봉은사 주지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종단과 정치권력을 향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징계와 법적 다툼을 겪기도 했습니다. 평생 수행과 현실 참여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그는 많은 논란과 평가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자의 삶을 이어갔던 명진 스님의 삶과 발자취를 차분히 돌아보고자 합니다.


❖ 법명

명진(明盡)

 

❖ 속명 / 성명

한기중 (韓基中)

 

❖ 생년월일

1950년 12월 9일

❖ 사망 (입적) 일

2026년 8월 22일

 

❖ 나이 / 향년

75세 (2026년 기준)

 

❖ 국적

대한민국

❖ 고향

충청남도 당진시

❖ 본관

공개되지 않음

 

❖ 주요 이력 / 경력

개운사 주지

대승불교승가회 회장

제11대 조계종 중앙총회 의원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봉은사 선원장

봉은사 주지

 

❖ 병역 / 군대

육군 맹호부대 (베트남 전쟁 참전)

 

❖ 신체

공개되지 않음

❖ 가족 관계 / 집안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

공개되지 않음

 

❖ 종교 종파

불교 조계종

 

❖ 출가

1969년 해인사 백련암

❖ 저서 / 책

스님은 아직도 사춘기

힘 좀 빼고 삽시다

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

힘 좀 빼고 삽시다 :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 명진스님 사망 원인 / 병명

해양 사고 / 8월 22일 오전 9시 38분 제주 서귀포시 하예동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물에 떠 있는 채로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오전 10시 28분께 사망 판정을 받았다.

 

❖ 명진스님 빈소 / 장례식장

법구 서귀포의료원 / 향후 장례일정 미정 / 머물던 제주 남선사와 절차 협의중

❖ 명진스님 발인 / 장례 일정

장례일정 미정

 

❖ 명진스님 장지 / 묘지 / 묘소

장례일정 미정

❖ 명진스님 소개

명진 스님,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수행자의 삶과 마지막 길 2026년 8월 22일, 불교계와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겨온 명진 스님이 갑작스럽게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수 76세, 법랍 52년.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세상과 담을 쌓지 않았고, 우리 사회의 아픔과 모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스님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명진 스님은 1950년 12월 9일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속명은 한기중, 법명은 명진(明盡)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청년 시절의 그는 훗날 한국 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수행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삶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맹호부대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현실을 직접 경험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은 이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불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9년이었습니다. 당시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가 성철 스님을 만났습니다.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큰스님을 찾아간 그는 어렵게 환담을 나눴고, 그 자리에서 법명까지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위해서는 불경을 제대로 공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공부가 자신의 적성에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그는 결국 당시에는 출가를 포기하고 세속의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맺어진 수행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불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1974년 법주사의 탄성 스님을 은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출가자의 삶에 들어섰습니다. 이 과정에는 명진 스님 특유의 성정이 잘 드러나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당시 여러 스님들이 그를 상좌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오히려 탄성 스님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명진 스님은 오히려 그런 무심함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탄성 스님의 상좌가 되겠다고 고집했고, 그렇게 평생의 수행 인연을 이어가게 됐습니다.

 

명진 스님의 수행 행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형적인 고승의 길과도 조금 달랐습니다. 많은 젊은 수행자들이 이름난 선방과 큰스님을 찾아다니며 공부의 길을 구했던 것과 달리, 그는 충북 청원의 한 허름한 초가에 머물던 재가 수행자 여백우 처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매 안거 때마다 그곳을 찾아 수행하며 자신의 길을 닦았다는 이야기는 명진 스님의 수행관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명성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권위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행의 길을 걸은 명진 스님은 봉암사와 해인사, 용화선원 등을 비롯한 여러 선원에서 50안거 이상 수행 정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문경 봉암사와의 인연은 깊었습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선 수행처였던 봉암사를 선승 외에는 출입하기 어렵도록 산문을 폐쇄하는 조치가 이루어진 데에도 명진 스님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속적인 명성과 편의를 좇기보다는 수행 공간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진 스님은 산속에서 수행만 하는 승려로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행자의 시선으로 현실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조계종의 종단 개혁 과정에 참여하면서 불교계 내부의 변화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중앙종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종단의 제도와 운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명진 스님의 사회활동 영역은 불교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92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1995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했습니다. 1998년에는 실업자연대 이사장을 맡았으며, 사회적 약자와 노동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외면하기 쉬운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2005년에는 6·15공동선언 남측준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같은 해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남북관계와 평화 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또한 경찰청 시민감사위원으로 활동했고, 월간 민족21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윤이상평화재단 부이사장,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09년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불교 대표로 집전을 맡았고, 이후에는 재단법인 진실의힘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는 수행모임 단지불회의 회주로 활동하며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함께 이어갔습니다.

명진 스님의 이름이 일반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천년고찰 봉은사를 이끌면서 그는 불교계 안팎의 여러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특히 당시 조계종 총무원과의 관계, 봉은사의 직영사찰 전환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커지면서 명진 스님은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그는 봉은사 주지 시절 당시 자승 총무원장과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습니다. 권력이나 종단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수행자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어디까지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를 놓고 찬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명진 스님의 발언과 행동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습니다.

 

봉은사 주지 임기를 마친 뒤에도 그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와 법회 등을 통해 종단 지도부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결국 2017년 조계종으로부터 승적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명진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징계의 부당성을 다투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재판에서는 1심과 2심 모두 명진 스님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2026년 초 조계종과 명진 스님이 서로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기로 하면서 오랜 갈등이 사실상 마무리됐고, 스님의 승적도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명진 스님의 사회 참여는 특정한 시기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혀왔습니다. 2012년 2월 방송된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 출연했을 당시에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보수 권력의 욕망과 거짓, 위선을 벗겨낼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문재인이라고 답했습니다. 한 승려의 정치적 전망을 넘어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와 권력 구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솔직하게 밝힌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에는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호소하는 105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후 이 선언이 국민모임 창당준비위원회로 발전하는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2017년에는 정의당 심상정 당시 대선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단에 참여했고, 2020년에는 심상정 후보의 유튜브 방송에 전화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현재 당원은 아니지만 정의당의 고문을 맡고 있다고 밝혔으며, 같은 해 정의당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대책위원회에서도 고문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명진 스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불교의 현실 참여를 상징하는 스님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종단과 정치권력에 지나치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평생 자신의 생각을 숨기기보다는 말하고 행동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산중에서 참선하고 수행하는 전통적인 승려의 모습과 사회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는 현실 참여형 지식인의 모습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진 스님의 삶을 사회활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수행이 있었습니다. 50안거 이상을 수행하며 오랜 세월 선방을 오갔고, 출가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수행자의 신분으로 살아왔습니다. 사회적 발언과 활동이 많았던 만큼 오히려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했던 흔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직접 쓴 책을 통해 자신의 수행 경험과 삶에 대한 생각을 전하기도 했으며, ‘스님은 아직도 사춘기’라는 책을 내면서 인간적인 고민과 수행자로서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8월 22일, 명진 스님의 삶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이날 오전 9시 38분께 제주 서귀포시 하예동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물에 떠 있는 상태로 구조됐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오전 10시 28분께 사망 판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해경은 스님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 등을 토대로 프리다이빙 연습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전해졌습니다. 법구는 서귀포의료원으로 옮겨졌으며, 조계종과 법주사, 스님이 머물던 제주 남선사 등을 중심으로 장례 절차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명진 스님의 마지막 소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던 수행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의 수행을 마친 원로 스님이었지만 삶의 현장에서 완전히 물러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수행과 사회적 발언, 불교계 개혁과 인권, 평화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으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명진 스님의 삶은 한 사람의 승려가 어떤 방식으로 시대와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청년이 불교를 만났고, 한때 출가를 포기했다가 다시 수행자의 길로 돌아왔으며, 산중 선방에서 수십 차례의 안거를 거친 수행자가 종단 개혁과 사회 문제에 뛰어들었습니다. 봉암사와 해인사 같은 수행처에서 참선하던 사람이 봉은사 주지로서 세상 한가운데에 섰고, 종단과 권력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삶에는 수행과 현실, 침묵과 발언, 산중과 세속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명진이라는 법명에는 ‘밝을 명(明)’과 ‘다할 진(盡)’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 이름처럼 자신의 방식으로 한 시대를 온전히 살아내려 했던 수행자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길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 때문에 때로는 갈등과 논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삶의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명진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삶은 단순히 한 명의 유명한 승려가 세상을 떠난 사건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불교의 수행 전통을 지키면서도 사회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 종단의 문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 인권과 평화, 사회적 약자의 문제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평가가 서로 다르더라도,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그가 남긴 흔적이 결코 작지 않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기중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명진이라는 법명을 받은 한 수행자는 그렇게 75년의 삶을 마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전쟁을 경험했던 청년은 수행자가 되었고, 수행자는 다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안거를 거치며 자신을 닦았고, 봉은사와 종단 개혁의 현장에서는 세상과 부딪혔습니다. 때로는 환영받았고 때로는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징계와 법정 다툼이라는 긴 시간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주에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입적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초 오랜 갈등이 마무리되고 승적까지 회복된 뒤 맞은 마지막 시간이었기에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 시대를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모습의 명진 스님이 기억될 것입니다. 조용히 참선하던 수행자의 모습도 있을 것이고, 거침없이 사회를 비판하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봉은사 주지로서 대중 앞에 섰던 모습, 종단 개혁을 이야기하던 모습, 사회적 약자와 평화를 이야기하던 모습도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한 가지 모습만으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명진 스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수행자이면서 사회참여자였고,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오랜 세월 선방에서 자신을 닦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갔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은 오래 기억될 만합니다.

 

이제 명진 스님은 긴 수행과 사회적 활동의 여정을 뒤로하고 마지막 길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수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때로는 세상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명진 스님. 이제는 모든 논쟁과 갈등, 명예와 비판을 내려놓고 고요한 길을 가셨으면 합니다. 오랜 수행의 시간이 부디 편안한 마지막 길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한 시대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명진 스님의 극락왕생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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